네이버 블로그에 서로이웃공개로 적었던 글의 일부를 티스토리에 옮겨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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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교수님과의 세 번째 면담을 마쳤다. 철학 수업 레포트에 대한 지도교수의 서명된 코멘트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눈보라를 구태여 헤치며 길에서 시간을 버리지 말고 줌으로 만나자는 그의 제안에도 불구하고 대면 만남을 가지게 된 이유다.
그와 만나기로 한 곳은 러시아 최고의 언어학 연구기관인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언어연구소였다. 아르바트역 8번 출구 바로 맞은 편에 위치해 있다. 러시아의 심장 같은 곳에 있네, 생각하며 들어갔다. 마치 팟캐스트를 진행해도 될 것 같은 3층의 녹음실에서 지도교수는 나를 맞이해주었다. 커피를 드실래요? 아니면 차? 얼 그레이에요. 커피와 차 모두 비닐도 뜯지 않은 새 것이라 선뜻 하나를 받아먹겠다고 말하기 망설여졌으나, 고민 끝에 결국 커피를 골랐다.
서명을 받으러 뵙는 김에 논문 진척 상황을 보고드린다고 해놓고 아무것도 준비해가지 않았다. 그래서 커피를 내리고 자리에 앉아 한국은 잘 갔다 왔느냐, 신정을 기념하는 가족 행사나 음식이 있느냐 등의 아이스 브레이킹에 겨우 대답하며 곧 드러날 나의 게으름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계속 걱정했다.
십 분 정도가 흐르자 드디어 나온 그의 말. 자, 그러면 논문에 대해 얘기해봅시다. "방향을 잃은 것 같다. 뭐부터 해야 될지 모르겠다"고 솔직하게 말씀드렸다.
좀전까지 나의 계획성과 정시성을 칭찬해주던 그는 예상하지 못한 답변인 듯, 이해가 되지 않는다, 분명히 명확한 계획이 있지 않았느냐, 다른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냐, 라고 물어보았다. 나에게는 삼촌이 없지만 마치 삼촌 같은 그의 친근한 말투에 하마터면 개인적인 고민들을 털어놓을 뻔했다.
다행히도 대충 얼버무렸고, "괜히 오가는 데에 시간 버리지 말고 다음에는 줌으로 만나서 예시 음성 파일 몇 개를 같이 듣는 것부터 해보자"는 말씀을 해주셨다.
언어연구소 3층의 녹음실은 모든 언어학자들에게 열려 있으니 높은 품질의 녹음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와서 써도 된다는 그의 말을 뒤로 하고 나는 왠지 모를 죄책감과 함께 눈 내리는 거리로 나왔다.
러시아 최고의 교육기관에서, 너무 좋은 동료들과 함께, 항상 호의적인 지도교수님의 도움으로, 풍족한 대한민국 정부의 재정적 지원과, 언제나 힘이 되는 가족들의 응원에 힘입어 공부하고 있는데, 나는 왜 스스로 멈추어 서있다고 느끼고 있으며,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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