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뜬금없지만 모스크바에 왔다. 박사과정 입학시험 응시를 위해서... 다른 대학은 다 원격으로 시험 보는데 여기만 대면 시험이다. 대면 시험을 준비해야 한다는 건 예상하고 있었는데 하나만 있는 줄 알았다가 시험을 세 개 봐야 한다는 사실은 몰랐다. 비행기도 직전에야 끊어서 왕복에 150만원을 지출했다. (나름의 항변을 하자면 석사논문 마무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입국심사에서 악명높은 랜덤 구속에 걸렸다. 테러 위협 이후로 상당히 랜덤한 이유로 2시간동안 여권을 검사다는 명목으로 그냥 복도에 방치해둔다. 대체 뭘 검사하는가? 그건 아무도 모른다. 상당히 불안해서 대사관에 연락해볼까도 생각했는데, 대사관 안내에 이미 있는 내용이었다. "입국심사는 주권국의 권리"이므로 뭐라고 할 수는 없다고... 나중에 들어보니 신여권일수록 걸릴 확률이 높고, 이전에 입국 기록이 없는 완전한 새 여권으로 들어오면 걸릴 확률이 높다고 한다. 러시아에 n번째 들어오시는 분이라면 입국 기록이 있는 구여권을 같이 챙겨오시는 것을 권장...
그렇게 토요일은 예상보다 늦은 시간에 도착했기 때문에 저녁만 빠르게 먹고 쓰러졌다. 비슷한 시기에 시험을 치르는 선배가 마침 같은 숙소에 머물고 있어 저녁은 같이 중식 우육면을 먹었는데, 맛이 그다지 뛰어나진 않았다. 무엇보다 중국 항공사를 이용해서 모스크바에 왔기에 네 끼 연속 중식을 먹는 느낌이었다. 중국 식당은... 호텔에서 가깝다는 데에 의의를 두었다.
일요일에는 시험장 건물까지 사전답사를 다녀왔다. 갈 때는 버스를 타고 갔고, 올 때는 걸어왔는데 상당히 멀었다. 엠게우의 한 변을 도보로 횡단하는 데에 30분은 걸리는 듯하다. 간 김에 식물원도 구경했는데, 식물원에서 올려다보이는 본관 모습이 상당히 멋있었다. 식물원 입장료는 300루블. 엠게우 근처를 방문한다면 꼭 들어가볼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다. 현지 사람들이 많이 찾고 가족 단위, 친구들(대부분 여성끼리), 커플 단위로 많이 찾는 듯했다. 일요일도 많이 걸어서 빠르게 쓰러졌다.
월요일에는 전공시험이 있어서 상당한 긴장 속에 두 시간이나 빨리 갔다. 너무 빨리 가서 외국인부서에 물어보니 그냥 앉아있던지 뭐라도 먹든지 마시던지 아무튼 돌아다니라길래 건물을 좀 돌아봤다. 인문학부 건물은 매우 거대했다. 1층에만 4개 정도의 부펫이 있었다. 기념품점도 있었다.
결국 시간이 되어 시험을 응시했다. 전형적인 러시아식 시험으로, 사전에 60개 정도 되는 문제를 주고 실제 시험장에서는 2개를 '제비뽑기'(진짜다)하여 잠깐의 준비시간 후 학과위원들 앞에서 구술로 대답하고 추가 질문을 조금 받는 형식이다. 전공시험은 바로 결과가 나왔는데, 다행히도 붙었다. 러시아어를 상당히 절었는데도 붙여준 것으로 보아, 실제로 이 사람이 언어학적 지식이 박사과정을 하기에 크게 모자라지 않는가? 정도만 시험에서 보는 것 같다. 미리 학과 측, 그리고 지도교수와 컨택을 했던 것도 긍정적인 요인인 것 같다. 위원들에게 사전에 공유가 되는지, 내가 누구랑 컨택했고 대충 어떤 분야를 연구할지 다 알고 있었다.
전공 시험은 학부 전체가 아니라 학과 단위로 봐서 그런지 상당히 가족적이었고, 나 포함 2명만 보았다. 같이 본 중국인은 북경대 학사, 고등경제대 석사 출신의 상당한 엘리트였는데, 상당히 러시아어를 잘 했고 (토르플 3급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전공지식도 뛰어났다. 학위서류 원본을 제출한 뒤, 중국인과 연락처를 교환하고 같이 좀 걸었다. 대화는 즐거웠으나 정장을 입어서 매우 더웠고, 구두끈을 잘못 매서 그런지 발목이 아팠다.
오늘 화요일에는 일종의 사회보장번호인 스닐스를 만들었다. 공증된 여권 사본이 필요한데, 한국에서 딱 한 부만 가져와서 이미 입학처에 제출해버렸다. 러시아에서 공증을 받아야 하기에, 오전에 가장 빨리 여는 곳을 찾아 여권 공증을 맡겼다. 한국에서는 대상자 본인이 번역해서 가면 금방 공증이 되는데 러시아는 그게 안 되나보다. 내가 번역을 해갔는데도 또 '자기들만의 번역본'을 만들어야 된다고 했다. 서류의 천국이다.
쩨레목에서 점심을 먹었다. 일종의 비즈니스런치 세트. 450루블 정도였다.
점심을 먹고 공증 맡긴 서류를 찾으러 갔다. 세 부 해서 4200루블. 근데 한 부만 했어도 될 것 같긴 하다. 서류를 찾고 나오자마자 더웠던 날씨가 무색하게 갑자기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다시 숙소로 복귀해 빗길에 알맞은 복장과 더 튼튼한 우산을 챙겼다.
스닐스는 원래 주민센터 격인 МФЦ에서 만들 수 있었는데, 얼마 전부터 정책이 바뀌어 지역거점복지센터? 라고 볼 수 있는 СФР에 가야 했다. 같이 갔던 선배가 전날 시내의 모 СФР 지점에서 하루종일 기다리기만 하고 정작 직원 얼굴도 못 보고 돌아왔다고 해서, 비교적 외곽이고 숙소에서 가까운 다른 곳을 갔다. 그런데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대기가 하나도 없었고 바로 스닐스 번호가 나왔다. 선배는 나한테 이 지점으로 가자고 해줘서 매우 고맙다는 말을 했다. 이상한 곳에 운이 있다.
그러나 그 운을 날리는 일은 러시아의 경의중앙선(?)이라고 할 수 있는 D4 열차를 20분이나 기다렸다는 사실이었다. 플랫폼이 야외여서 너무 추웠다. 더위와 추위가 하루에 공존하는 매우 아름다운 날씨이다. 저녁은 대충 샤우르마로 먹고 다음주에 있을 철학 시험을 준비하고 이 글을 쓰며 하루를 마무리하고 있다.
'러시아 > 학업과 진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앓으면서 맞이하는 모스크바의 주말 (0) | 2025.06.22 |
---|---|
제2입학시험 전 쓰는 글 (1) | 2025.06.19 |
석사 → 박사 진척상황 정리 (2) | 2025.05.30 |
많은 것을 해야하는 나머지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3) | 2024.12.27 |
국내 대학원생이 받을 수 있는 외부장학금 정리 (5) | 2024.01.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