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노어노문학 전공생이며, 취미로 오케스트라를 합니다)
2020년, 먼 미래. 러시아엔 치명적인 바이러스의 광풍이 온 국토를 휩쓸고 있다. 제 3의 도시, 노보시비르스크에서 20km 떨어진 아카뎀고로도크에도 마찬가지. 이미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바이러스에 사람들은 인터넷을 통해 모든 것을 해결한다. 우리 아마추어 오케스트라도 원격으로 녹음을 받아 서로의 소리를 합쳐내는 방법을 누군가 생각해냈다. (하략)
그렇네요. 지금의 상황이 SF가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모두 진실입니다. 엔게우 오케스트라에선 비올라를 켜고, 녹화해서 Google Drive에 올려야 합니다. 3월 24일에 지휘자가 지휘영상을 올렸고, 클라리넷을 시작으로 여러 단원들이 영상을 올렸습니다. 저는 10명쯤 되면 탑승해볼까 생각하고 조금씩 연습하고 있었죠.
그런데 하필 반 주일 정도 쉬고 처음 비올라를 켜는 오늘 (케이스에서 오래된 나무 냄새 났음) 영상을 보내라고 악장님께 연락이 옵니다. 으, 평소보다도 훨씬 굳어버린 손인데, 헤드폰에 맞춰서 켜려니 말도 안되게 끔찍한 결과가 나왔습니다. 정말이지 내일 보내고 싶었지만, 저는 저를 잘 알죠. 내일의 저는 비올라를 연습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어절 수 없이 끔찍한 버전을 구글 드라이브에 업로드합니다.
악장님께 '아주 잘했어요!'라고 답장이 옵니다. '아니 이게 어떻게 잘한 거죠?'라고 답장...할 사이는 아니라서 감사하다고 답했습니다.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의 악장들은 비올라 주자들한테 유독 친절합니다. 자기들 산하인 퍼바와 세바는 이래저래 연습에서 부딪히는데, 비올라와는 이해관계가 크게 겹치지 않다는 점도 있겠고, 아마추어 비올라 주자의 희귀함도 주자들을 막 대할 수 없게 해주고, 무엇보다 정통 오케곡에서는 비올라가 그...닥 잘할 필요가 없다는 점, 그리고 애매한 중진주자들보다 완전한 초급자들에게 '잘했어요!'를 남발해주는 악기세계 특유의 문화도 있겠죠.
항상 저도 어디 가서 연주하면 '쟤는 진짜 오래 했나보다'라는 느낌을 주고 싶은데, 아직도 고급 입문자 수준에서 머물러있다는게 너무 서글픕니다. 오케스트라 경력은 2년이지만, 실질적인 연습기간은 봄 연주회 2주, 잔디밭 연주회 3주, 정기연주회 두 달이라 연간 석 달이 채 되지 않구요. 그마저도 제대로된 연습이 아니라 특정한 곡을 외우는 것이라, 실제 실력엔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요.
아무쪼록 온라인 연습이라는 하나의 밀린 과제를 끝냈네요. 비올라는 더 열심히 연습해야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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