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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기타분야 공부

번역, 까다롭지만 뿌듯한 - 권남희의 <번역에 살고 죽고>

by 누에고치 2021. 4. 26.

번역, 까다롭지만 뿌듯한

권남희의 <번역에 살고 죽고>를 읽고 쓰는 에세이

2016. 11. 09

 

권남희, 번역에 살고 죽고 (표지 이미지)

번역. 익히 들었지만 깊게 찾아보거나 생각해본 적은 없는 일이다. 작가가 우연히 들은 친적들의 만담에 따르면일본글을 조선글로 바꾸는 존 기술이지만, 한편으로는 업무량과 경력에 비해 명성이나 부를 얻기 힘든, 배곯기 딱 좋은 기술이기도 하다.

 

나 역시 번역에 대해 그리 깊게 알아본 적은 없었다. 막연하게 번역가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도, 실제로 아마추어 SF소설 터뮤니티에서 외국 작품을 번역했을 적에도, ‘누구 지음밑에 자그맣게 붙어 있는 옮긴이의 삶에는 큰 관심을 가지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프로 번역의 세계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학교 도서관에서 번역에 대한 책을 찾아봤다. 박사 과정에서나 볼 법한 이론서와, 작가가 본업인 사람이 짧게 다뤄놓은 책, 700, 800, 000에 흩어져 있던 책들을 찾다가 이 책을 발견하게 되었다. 번역에 어떻게 입문했는 지, 작가와의 소통은 어떻게 하는 지, 온갖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다 모았으면서도 무겁지 않은, 일어 번역가 권남희의 책이었다.

 

작가는 번역을 단순한 부업거리나, 외국어를 어느 정도 하면 언제나 입문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경계하며 이렇게 말한다. 번역을 전업으로 하려면 오래도록 준비하거나 철저히 알아보지 않고서는 힘들고, 소설가 못지 않게 창조적 지식노동이 얼마나 고된 일인지 여실히 보여주는 직업이 바로 번역가라고 말이다.

 

얼핏 들으면 흔한 엄살로 들릴 지도 모르지만, 번역을 접해 본 나로서는 이해할 수 있는 경고였다. SF 커뮤니티의 말을 빌리자면, ‘번역의 질은 수능 등급도, 토익 점수도 아니라 바로 국어 능력에 비례하는것이기 때문이다. 교과서 영어 독해보다는 오히려 뚝딱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고치고 또 고치는 작업 끝에야 자연스런 글이 나오는 소설가에 가깝다는 얘기이다. 작가의 경고를 흘려들을 수만은 없는 이유이다.

 

작가의 번역 인생과 번역의 실제에 관한 장으로 접어들면 그 경고가 더욱 마음에 와닿는다. 대학을 졸업하고 할 일이 없었던 작가가 심심풀이로 번역했던 노트를 타이핑해 출판사로 보낸 일부터 시작되는 구구절절한 번역인생사는 중견 번역가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 그 기나긴 인생사 가운데 네 가지 키워드를 뽑아 번역의 실제를 요약해보고자 한다.

 

내가 특히 인상깊게 본 부분은 출판사와 관련된 부분이었는데, 아무리 번역이 훌륭해도 출판사와 담을 쌓으면 번역가로서 살아나가기 힘들 것이므로 이에 대해 알아둬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흔히 취업을 위해 여기저기 이력서나 자소서를 돌리고는 하지만, 번역가들은 검토서를 보낸다는 사실부터 신선했다. 검토서란이러이러한 책을 읽어보니 꽤나 재밌어 국내에 번역해 팔면 잘 나갈 것 같습니다의 내용을 담은 소개서인데, 검토서를 잘 쓰는 것이 평판에 작지 않은 영향을 주고, 따라서 일을 얻는 것으로 연결된다고 한다. 책을 읽은 즉시 독후감을 쓰는 버릇이 아직 완전히 배지 않았는데, 번역가가 되려면 많은 책을 읽고 그에 대한 코멘트와 느낌, 해외 반응 등을 50%는 주관적으로, 나머지는 객관적으로 쓰는 연습을 해봐야겠다.

 

편집자의 존재도 새로 알게 된 사실이었다. 출판사에서 편집자가 이름은 드러나지 않지만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말은 오래 전부터 들어보긴 했지만, 이 책을 통해 그의 자세한 역할을 알게 되었다. 짧게 말하자면 번역가가 옮겨둔 원고를상업 출판물로서의 가치가 있도록 바꿔주는 사람이라 할 수 있겠다. 그래서 가장 만날 일이 많은 사람이 편집자이고, 이와의 관계를 잘 다져두는 것이 원만한 번역 인생의 키워드라고 한다. 번역가도 평생 골방에서 틀어박혀 있는 게 아니라 사람을 만나야 할 일이 생긴다니 참으로 다행이다.

 

마감과 교정은 출판사만의 개념은 아니라 그런지 비교적 친숙하게 들렸다. 마감일에 대한 압박은 지금도 각종 과제에 쫓기는 입장에서 썩 반가운 특성은 아니었지만, 어느 일이든 확실한 마감일이 있어야 좋다는 생각 아래에서 필요악으로 받아들여야겠다. 교정 또한 커뮤니티에서 다른 번역자/작가들에게 피드백을 받아본 적이 있다. 가끔 교정한 원고가 더 이상해져 돌아온 적도 있었는데, 그런 경우엔 나도 작가처럼 내 스타일을 고수할 것 같다. 번역한 원고는 내가 다시 쓴 글이자 재창작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위의 네 가지 개념으로 표현된 번역의 세계는 이미 익숙한 면도 있었지만, 어렴풋하던 것이 확실해진 면이나 전혀 모르던 것을 알게된 면도 있었다. 모두가 동등한 위치였던 아마추어 커뮤니티와는 달리, 프로 세계는 출판사가 존재하고 편집자, 번역가, 현지 에이전시, 사장 등 각자의 입장이 뚜렷한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 가장 큰 수화이었던 것 같다. 특히 검토서-편집자-마감-교정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이 출판사 입장에서는 당연하겠지만 처음 본 나에게는 참 신기했다.

 

크게 어려운 개념들은 아니지만, 이런 유의점들이 그냥 나열되어 있었다면 이 책을 사흘 안에 읽을 순 없없을 것이다. 책을 재밌고 부드럽게 읽을 수 있도록 해준 건 작가 본인의 생활에 관한 얘기였다. 가족이나 아이에 관한 시시콜콜한 얘기부터 번역에 관련된 에피소드까지, 에세이이지만 재밌는 이야기책을 읽는 듯했다.

 

생활 가운데 처음으로 눈에 들어왔던 것은 번역가의 삶의 방식과 일과였다. 재택근무이긴 하지만, 중견 번역가인 작가도 가사노동을 등한시하며불량 주부가 되어야 제시간에 번역을 끝낼 수 있다니 참 슬픈 직업이다. 그러면서 번역분량에 따른 바쁨의 정도를 알려주는데, 보통 한 달에 1000장 옮기기가 어렵다고 한다. 내 체력을 생각해봤을 때 너무 무리하면 정신, 신체적으로 병에 걸릴 수 있으니 적당히 조절하는 게 좋겠다.

 

역자 후기나 저서에 대한 얘기도 있다. 남의 글을 옮기는 것이 아니라 직접 글을 쓰는 것이다. 저서가 있으면 인지도가 약간 올라가고, 역자 후기는 독자와의 유일한 소통 공간이라고 한다. 작가는 초기에 아이에 관한 내용을 넣어 자유롭게 썼다고 하는데, 나도 작품을 하나 옮길 때마다 역자 후기를 짧게나마 써보는 연습을 해봐야겠다.

 

책의 말미에서 작가는 본인이 번역했던 책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제목이 많았다. 카모메 식당 같은 경우 영화로 보기도 했다. 그동안 일본 문학에 큰 관심을 두진 못했는데, 읽어보니 꽤나 흥미로운 내용이 많았다. 보통 책을 50권 읽으면 세 권만 출판되도 잘 된 것이라고 하니, 많은 독서의 필요성이 느껴진다. 난 노어 번역가를 희망하는 만큼, 얼핏 봤던 이현우의 러시아 문학사와 책 소개를 보고 그 책들을 읽어봐야겠다는 결심이 들었다.

 

이런 노력들을 기울여야 실력이 중심의 세계이자 밤낮 책을 읽고 옮기고 검토하는 세계인 번역에 더 잘 적응할 수 있을 것 같다. 한편으론 눈앞이 어둡지만, 그래도 외국 문학을 접한다는 메리트는 결코 작지 않은 것 같다.

 

지금은 러시아 문학이 가장 번역하고 싶은 분야지만, 꼭 그것이 아니더라도 다른 나라의 문화나 사상을 우리나라에 알려 사람들에게 감동이나 슬픔, 깨달음을 줄 수 있게 하는 전달자이자 재창조자가 되고 싶다. 그렇게까지 거창한 번역가가 되지는 못하더라도, 매끄러운 번역으로 곡해 없이 본질을 잘 전달하는 번역가만 되도 다행일 것 같다.

 

이 책이 그렇게 되는 길에 있어서 번역의 방법을 알려준 것은 아니지만, 선배 번역가로서 출판사의 시스템과 원고료, 저서와 저명성 등의 부분에서 현실의 번역 세계를 알게 해주었고, 이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 내가 무엇을 준비해야 될 지,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할 지 알려준 길잡이가 되어준 것 같다. 번역에 대한 큰 그림을 잡는 데에 도움이 된 책이었다.

 

* 감상문 중작가는 책을 쓴 권남희 작가를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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