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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 노보시비르스크/러시아 문화생활

[서평] 박노자 - 러시아 혁명사 강의

by 누에고치 2020. 4. 29.

'주식회사 대한민국'을 읽고 나서 박노자가 어떤 정치적 스탠스를 취하는지 조금 더 알고 싶어서 읽어본 책. 사실 '붓다를 죽인 부처'를 읽으려다가 너무 문체가 어려워서 그만두고 이걸로 넘어왔다. 문체 얘기가 나왔으니 이어가보자.

 

문체

박노자 본인의 고유 문체인지, 혹은 편집진 측에서 손을 댄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대중 교양서 특유의 문체로 적혀있다. 뭐뭐한 것이지요. 뭐뭐하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같은. 태생적으로 외국인임에도 한국어를 아무런 무리 없이 구사하는 것은 경이로우나, 동시에 그의 문체는 학계에 오래 종사한 사람 특유의 고리타분함이 조금은 있다. 특히 '붓다를 죽인 부처'는 한 장을 넘기기가 어려울 정도로 한자어로 점철되어 있다. 그렇지만 본 책에서는 최대한 말을 풀어쓰려 한 티가 나며 실제로도 책장이 술술 넘어갔기에, 전체적으로 이해하는 데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내 문체가 딱 그런 고리타분하면서 애매하게 대중지향적인 말투기 때문에 더 거슬렸을지도 모른다.

 

전체적인 서평

러시아혁명사를 조목조목 알 수 있는 책이라기보다는 박노자 개인의 정치적 의견을 조금 많이 섞은 사상서라고 볼 수 있다. 전체적인 흐름은 알 수 있겠으나, 박노자는 사실의 검증보다는 평가에 조금 더 공을 들여놓았다.

 

우선 전체적인 역사흐름은 알던대로지만 새로운 곁가지 지식을 몇가지 알게 되었다. 숙청의 정치적 의의라든지, 미국에 의해 없어진 공산주의자들보다 스탈린 펜끝 아래 희생된 공산주의자가 훨씬 많다는 사실이라든지, 그런 중요하다면 중요하고 필요없다면 필요없는 트리비아들.

 

트로츠키에 대해 상당부분을 할애한다. 트로츠키가 주류파에 의해 배척되었기에 마이너하다고 볼 수 있지만 사실 전통적 공산주의 이론을 가장 강력하게 주장한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일국사회주의 이론을 비판하고 타국으로의 확산을 계속 주장한 사람이라는 것 정도까지 기억이 난다. 트로츠키주의에 대해 옹호적인가... 싶으면서도 사분오열하는 교조적 트로츠키주의자들에게 실망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또 그는 '좌파정당'이라는 것 자체가 사회의 변혁을 꿈꾸면서 기존 의회제도 내에 들어가있다는 모순점을 어쩔수 없이 안고가는 존재라고 말하는데, 이로 인해 갈수록 보수화, 우경화되는 경향을 보이는 좌파정당이 많다는 점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듯하다.

 

이 외에도 흥미로운 부분이 많은데, 특히 후반부에 책갈피를 많이 꽂은 편이기에 인용문에서 해당 부분을 인용하며 밝히겠다.

 

인용문

#1 적색 개발주의의 기간적 한계

"그런데 관료들이 개발을 주도하다 보면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는 자본가로 변모하기 대문에 이 형태가 지속되기는 어려워요. 집권 세력의 입장에서는 사적 소유권이 확보되지 않는 사회를 오래 견딜 수 없는 거에요. 그래서 역사적으로 볼 때 적색 개발주의는 길어야 70-80년 정도 되는 제한된 시기에..."

소련의 적색개발주의가 진행되더라도 고위 관료는 부의 축적이나 세습에 있어 자본주의 사회만큼 안정된 2세창출을 해내지 못했기에, 그들이 오히려 자본주의화를 원했다는 내용. 흥미롭다.

 

#2 낮에는 클래식, 저녁에는 배급소

"체스를 두고 지질학과 고고학을 배우는 등 아주 많은 과외 활동을 했음에도 돈 한 푼 내지 않았어요. 그 대신 빵을 사기 위해선 줄을 서야했던 거지요."

국가화된 문화정책에 의해 클래식 음악을 언제든지 듣고 학문을 원한다면 배울 수 있었으나 정작 일상소비재가 안정되지 못했다는 장단점이 있었다는 소련의 전통적인 클리셰.

 

#3 공산국가의 '마법의 20년'

"북한의 경우 1945년에 혁명이 시작됐다고 본다면, (...) 숙청을 거쳐 1965년 즈음에 일파 지배 구도가 완성되고 1960년대 말에 이르면 (...) 일인 지배가 굳어지지요. 중국은 1949년의 혁명 이후 반우파 투쟁,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 등을 거쳐 1969년이 되면 마오쩌둥 계파의 배타적인 지배가 확립됩니다. (...) 1917년에 혁명이 일어난 러시아에서는 1937년에 이르면 숙청 과정을 거쳐 옛날의 공산당이 사실상 해체됩니다."

일부러 끼워맞춘 숫자일지 모르겠으나, 흥미롭게도 딱 20년을 전후해 초기 혁명세력은 거의 잔존하지 않고 1인지배가 확립되었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4 이란의 공산주의 운동

"1930년대 초반 이래로 이란 공산주의자들은 노동운동계에서 거의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했지요. 이란에서 공산당은 원칙적으로 비합법 정당, 즉 지하운동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보적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고려해봐야 할 만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어요."

호메이니 이전 이란에 대해선 잘 몰랐는데, 흥미가 가는 내용.

 

#5 신간회와 코민테른

"이데올로기가 잘 먹히는 이들과 제휴해 이들을 급진화시키고 함께 제국주의를 무너뜨리자는 게 코민테른의 입장으로 채택된 겁니다. 이후 민족주의 세력과의 좌우합작은 공산주의 운동의 대원칙이 됩니다. 1920년대 후반 조선에서 좌우합작을 통해 결성된 신간회의 청사진이 이때 만들어졌다고..."

신간회가 소련 공산주의 세력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알았지만 조직적인 합작계획에 의한 것이었다는 의견은 이 책을 통해 처음 들어보았다. 이 외에도 러시아제국 시기 조선 관리가 '겉으론 화려하나 하층민계급은 고통받는 사회인 것 같다'는 저술을 한 것이 매우 날카로운 분석이라며 칭찬하는 부분도 흥미로웠다. 조선에도 나름 보는 눈이 있는 관료들은 있었으나, 사실 보는 눈이 있다는 것은 이 나라에 딱히 답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는 사실이기도 하기에... 현실주의자들은 친일로 전향했었겠지.

 

#6 강고한 핵심부 자본주의

"핵심부 자본주의가 얼마나 강고한지"

그리스의 실업률이 기하학적으로 높은데도 혁명이 일어나고 있지 않음은 핵심부 자본주의의 강고함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어느정도 맞는 의견이라고 생각하는 게, 지금 젊은이들은 언뜻 헬조선이라는 데에는 동감하나 동시에 '분위기 짱 카페'라든가 '개꿀템', '동물의 숲' 등의 자본주의적 기제가 삶에 너무 잘 스며들어있다. 이런 사회에선 아무리 바닥을 치는 분위기가 오더라도 자본주의가 무너지기보다는 개인을 탓하게 될 것이라고 나도 본다.

 

비판적 서평 인용 (노동자연대)

기존에 잘못 알려진 사실들을 짜깁기해서 개인의 경험과 적절히 섞어놓았다는 아주 비판적인 서평도 있었다. 가만보면 박노자도 반골이고 모두까기 기질인데 반해 자료검증이 항상 완벽한 편은 아니라서, 주변에 적이 많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나는 러시아혁명사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없기 때문에 누가 맞는지는 모르나, 확실히 본 책은 단지 입문서로서, 저자의 신념을 아는 도구로써 활용해야지, 역사적인 검증에 쓰기엔 무리겠다.

 

서평 링크: https://wspaper.org/article/19453

 

박노자 《러시아혁명사 강의》 서평: 오류와 혼란투성이 러시아혁명사 책

박노자가 2007년부터 2016년까지 강의한 것을 수정·보완해 《러시아혁명사 강의》를 출간했다. 그래서 박노자의 이전 글들을 본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을 때 “어디서 봤더라?” 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을 것이다. 눈치 빠른 사람은 짐작했겠지만, 이 책에서 박노자는 러시아 혁명사에 대한 새로운 연구나 분석을 제시하기보다는 기존의 주장들, 그것도 잘못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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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줄 정리

입문서로 쓰기에 적당하고 흥미로운 사실과 박노자만의 특유 관점이 포함되어있으나, 제목대로 중립적인 역사교양서로 보기엔 문제가 있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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