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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여행기

하바롭스크 여행기: #7 홀로 산책하기 좋은 도시... 그리고 새벽의 파티.

by 누에고치 2021. 7. 23.

'불바르'라는 건 별 게 없고, 그냥 양쪽에 가로수가 있는 길이다.

한국인들을 뒤로 하고, 강변 불바르를 계속 걸어서 강가로 갔다. 이 여행기에 있어서 '불바르'라는 건 별 게 없고, 그냥 양쪽에 가로수가 있는 길이다. 사실 이런 걸 불바르라고 불러도 되나 싶긴 하지만... 지도상 이게 '불바르'라고 하길래, 얀덱스의 표현을 믿을 뿐이다.

 

참고: 조금 더 '불바르'다운 중앙시장 옆의 길 (6월 30일)

강가로 와보니 한국인들이 여기서도 유람선을 타고 있었다. 내가 천천히 걸었다는 것을 체감했다. 어쩌면 한국인들이 빨랐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한국이니까.

 

강가로 내려가는 계단.

이전부터 사진을 보면 독자 여러분께서는 느끼셨겠지만, 별로 여행을 하기에 좋은 날씨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나쁜 날씨는 아니었지만, 여행 중 해가 쨍하게 나온 시간을 모두 합해도 온전히 하루가 안 될 것 같다는 셈을 해 보았다.

 

강가에 도착한 때가 딱 다섯 시 정도라서 원래 여섯 시에 만나기로 했던 친구와 전화를 해 보았다. 친구나 나나 왠지 따로 다녔던 하루의 일정에 만족한 것 같았고 굳이 저녁을 함께 보내고 싶지 않아하는 것 같았기에 만나자는 일정은 자연스레 취소됐다. 따로 다니기로 한 김에 강변에 좀 앉아있기로 했다. 여행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순간이다. 강이 만드는 너울 구경하기. 호숫가를 걸어다니는 오리 구경하기. 꿀을 먹는 호박벌 구경하기.

 

평화로운 강과 시커먼 매연

비슷하게 강변에 놀러온 러시아 사람들 몇 명이 있었다. 강을 여러 장 찍었는데 별로 마음에 드는 사진은 없다. 날씨가 흐리멍덩해서 별로 좋은 사진이 나오지 않았다. 위의 사진도 강변이 아니라 성당 뒤편에서 찍은 것이다.

한동안 강변에 있다가 올라오는 길. 금요일 저녁이라 그런지, 아니면 여기가 관광지 최중심부라 그런지 가족 단위로 놀러오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가족 단위로 놀러갈 나이는 지난 대학생에게 이런 팀들은 언제나 옛날 사진을 꺼내보는듯한 정겨운 기분을 들게 만든다.

 

빠질 수 없는 우스펜스키 성당.

강변 쪽은 박물관이 모여있기에 여러 곳을 연달아 보려고 했지만 시간이 5시라 딱 하나를 볼 시간만 있었다. 보통 6시에 모두 닫기 때문. 조금 고민하다가 국립미술관을 들어갔다. 여기도 1층만 영어가 가능했다. 왠지 모르겠지만 러시아에 대중화된 것 같은 비닐 덧신을 신고 바스락거리며 3-2-1층 순서로 내려오면서 볼 수 있었다. 기억나는 점이라면 견학 온 것 같은 학생들이 되게 유심히 그림을 봐서 '이것이 인문학의 전통이 살아있는 나라인가'라는 생각을 했던 것 정도. 그런데 한국 미술관에서도 그런 학생들이 분명히 있을텐데, 내가 그동안 미술관을 안 갔던 게 분명하다.

 

3층은 이런저런 작품이 있었고 과 학회에서 발표했던 제롬 작품도 있었다. 발표는 사실 하루만에 준비하는 건데도 왠지 조금이라도 더 보게 되고, 비슷한 점도 찾게 되고 그렇다. 발표자도 이런데 전공하는 학생들과 교수님들은 전공분야의 작품들이 얼마나 각별하게 느껴질까 싶다.

 

2층은 현대 하바롭스크 작가 단독전이엇다. 신기하게 사진도 아니고 그림인데도 흑백 그림은 옛날, 칼라 그림은 최근의 작품이었다. 홀이 더 있었던 것 같은데 뭔가 속고 못 본 느낌이 들었다. 1층은 따로 티켓을 끊어야 된다고 못 들어가게 했다. 사실 미술관에 들어간 이유가 밖에 커다랗게 걸려있는 무민 그림 때문이었는데, 이건 별도로 티켓을 파는 건지, 아니면 시간을 정해서 여는 관람인지 모르겠다. 러시아어를 전혀 자유롭지 않게 구사하던 시기라서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2019년 여행에서도 사실 크게 다르진 않았다. 2021년 올해 정도는 되어야 조금 알아들을 듯...)

 

박물관에 들어가기로 했던 동인인 무민트롤 전시 (익일인 6월 30일 사진)

미술관을 나와서도 비가 계속 왔고, 비를 피할 겸 잠깐 기념품점에 들어갔다. 원래는 둘러보고 나오려고 했지만 왠지 그냥 나가기가 좀 그래서 마그닛 하나를 50루블에 샀다. 냉장고에 지금까지도 붙어있으니 괜찮은 소비가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원래 대로변에 있는 브드로바(В дрова)라는 식당을 가려고 했는데, 너무 사람이 많고 정신없어서 입구에서 돌아나왔다. 배가 고픈 건 변하지 않았고 조금 더 생각해보니 일식이 당겨서 '일식'을 검색하니 나온 '도쿄 스트릿'을 들어갔다.

 

메뉴판을 줘서 시켰는데 '이 요리는 지금 안 된다'고 대답해서 러시아어가 막혔다. 메뉴는 순식간에 골랐지만 주문을 어떻게 할지 한참 고민하다가 웨이터를 부르는 언어 초보자에겐 너무 가혹한 시련이었다. 다른 만만해보이는 메뉴랑 홍차 한 병을 손으로 집어서 시켰다. 동양인 웨이터라서 기억에 남는다. '물도 더 부어드릴까요?' 물어봤는데 내가 못 알아들어서 'ВОДА. ЕЩЁ?'라고 물어봤었다. 이렇게 어수룩한 티를 내면 어딜 가나 러시아인들 특유의 실실 웃는 표정이 보이는데, 참 여행 때마다 서글펐던 기억이 난다.

 

겨우 우동에다 녹차인데 652루블, 만 삼천 원 가량이 나왔다. 유학 때도 느꼈지만 러시아에서 일식은 왠지 고급 음식이란 이미지인가보다. 외대 앞에서는 이것보다 훨씬 큰 그릇에 담겨나오는 라멘을 8천원에 먹을 수 있고, 일본 본토에서는 돈부리나 우동이 거의 김밥에 라면 같은 이미지니까 말이다. 가격에 비해 양이 현저히 적긴 했지만... 배고파서 맛이 아예 없진 않았다. 어딜 가나 저렇게 병으로 된 잎차를 시키면 200루블 정도 하는데, 차를 좋아하는 입장에서 별로 아깝진 않았다. 비 오는 날 유부 띄운 따끈한 우동이라니, 정말 타국에서도 돈만 있으면 호강이다. 잘 먹고 나왔다.

 

버스에서 내려서.

30분에 하나씩 오는 4번 버스를 기다리다 5분 내에 안 오면 대충 다른 버스를 잡아타고 10분쯤 걸어서 들어가야지! ...라고 생각하는 순간 4번 버스가 왔다. 차장 아주머니 없이 버스기사만 있는 차는 처음이라 100루블을 통으로 내면 짜증내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기껏 버스에 앉아서 딴짓도 못하고 내릴 때만 기다리면서 긴장했는데, 알고보니 운전석 옆에 75루블을 항상 준비해놓고 계셨다. 당연히 나만 100루블을 내는 게 아니겠지. 긴장해서 그런지, 내리고 보니 원래 내리는 곳보다 2정거장이나 앞이었다. 버스를 타는 것조차 도전이니 외국 생활은 얼마나 어려운가! 일찍 내린만큼 더 걸어서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에 와보니 친구는 아직 없길래 전화를 걸었다. Алло?부터 시작해서 되도 않는 명사 러시아어로 통화를 이어가니까 옆 방에 새로 묵으신 분이 한국인이시냐고 묻는 이상한 해프닝도 있었다. 그 분은 사촌이랑 함께 블라디보스톡 왕복 비행기를 끊고 여기까진 철도로 오신 분이었는데,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나중엔 또 친구가 와서 셋이서 더 얘기를 했다. 주인 분이 나중에 1층에서 파티가 있을 거라고, 부르겠다고 했다.

 

9시도 되기 전에 그렇게 말했는데 11시까지 부르질 않길래 친구는 심지어 그냥 우리끼리 다른 펍을 갈까, 얘기도 했다. 11시 좀 넘어서 파티에 오라고 부르러 오셨다. 주인 분이 젊기 때문에 그 친구들(유학하시는 한국인들)과, 러시아 친구들 몇 명이 있었다. 어색하게 인사하고, 쿵쿵대는 비트 속에서, 잔뜩 취한 러시아 친구가 따라하라고 시키는 괴상한 춤을 추고, 하바롭스크 특산품이라는 맥주를 마시고, 잠깐 쉬면서 시시콜콜한 대화를 듣고, 춤추고, 마시고, 쉬고, 이제는 자야겠다... 싶어서 침실에 올라갔다가, 여전히 둥 둥 거리는 소리에 잠이 잘 안 와서 몇 번 오르락내리락, 이랬던 것 같다. 2시가 넘어서야 겨우 잠들었다.

사교적인 편이 아닌데다가 관심있는 주제도 조금 마이너한 것들이라 액티브한 대화를 하진 못했지만, 한국 분들은 이런저런 잡담 중에 하바롭스크와 블라디보스톡의 간단한 역사를 얘기해줬던 게 기억에 남고, 러시아인이랑은 말이 짧아서 오래 대화는 못 했지만 하늘색 셔츠를 입은 분이랑 러시아어 공부를 하는 이유라든지, 나중에 대학원에 가고 싶다든지, 그런 토르플 1급에도 안 나올 대화를 겨우겨우 이어갔던 기억이 난다. 귀찮아하지 않고 잘 들어주는 착한 친구라서 다행이었다. 그랬다.

 

지금도 나는 1인실이 더 편하고, 혼자 여행하기를 좋아하고, 떠들썩한 파티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오히려 젊은 사장이 운영하는 한인민박이었기에, 그리고 조금 안 맞는 친구와 함께 갔기에 더 많은 경험을 해본 것 같다. 그냥 거리를 떠돌아다니는 여행이 아니라 원래라면 그냥 스쳐지나갔을 사람들과 한 마디라도 더 나눠보고, 술에 취한 친구가 시키는 셔플 댄스도 춰보고,  더욱 특이한 일을 겪어본 듯하다.

 

3일차 (2021/6/29 금) 총지출

35번 버스 30

아침(닭볶음밥과 샐러드) 190

설탕넣은 아메리카노 110

하바롭스크 역사박물관 250

1л번 버스 23

미술관 300

하바롭스크 마그넷 50

라멘과 녹차 652

4번 마을버스 25

= 총 1630루블 (약 32000원)

 

2018 하바롭스크-블라디보스톡 여행기 전체 목록

  1. 2020.04.04 - 하바롭스크 여행기: #1 헤맴의 연속
  2. 2021.01.17 - 하바롭스크 여행기: #2 또 시작된 헤맴
  3. 2021.01.18 - 하바롭스크 여행기: #3 갈등과 깨달음
  4. 2021.01.27 - 하바롭스크 여행기: #4 비 내리는 하바롭스크
  5. 2021.07.19 - 하바롭스크 여행기: #5 이틀차 저녁식사, 중심부 산책
  6. 2021.07.21 - 하바롭스크 여행기: #6 역사박물관과 프라오브라젠스키 성당
  7. 2021.07.23 - 하바롭스크 여행기: #7 홀로 산책하기 좋은 도시... 그리고 새벽의 파티.
  8. 2021.07.25 - 하바롭스크 여행기: #8 조지아 음식! 삼사! 하바롭스크 마지막 날.
  9. 2021.07.27 - 하바롭스크 여행기 #9: 친구와 단둘이 러시아 횡단열차 타기 (하바롭스크 - 블라디보스토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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