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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여행기

하바롭스크 여행기: #4 비 내리는 하바롭스크

by 누에고치 2021. 1. 27.

 

그렇게 시장을 떠나 걸어오는 동안에도, 비는 여전히 그칠 기미를 안 보였다. 우리는 계속 비를 맞으며 시내로 걸어갔다. 시장과 중앙 광장은 그렇게 멀지 않다. 도보로 11분 정도가 걸리는 거리다.

 

시장과 중앙 광장 사이의 도보 경로를 나타내는 지도. 그리 멀지 않다.

레닌광장 바로 앞에서 더이상 비를 맞기 싫어서 잠깐 서점 크니즈니 미르Книжный Мир에 들어왔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책을 읽는 것보다 오히려 서가에서 무슨 책들이 있나, 살펴보는 걸 더 좋아한다. 이때는 표지를 보고도 무슨 책인지 모르던 시절인데도, 서가를 보는 게 즐거웠다.

 

애석하게도, 서점을 꽤 돌아봤지만 비는 멈춰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여기서 책을 사서 비에 젖게 할 수도 없었기에, 우리는 이내 서점을 나와야만 했다.

 

서점의 고전 코너.

 

서점에서 육교를 건너면 바로 시내 최중심부인 레닌 광장이다. 사실 어제 유심을 살 때도 여기서 내린 것이지만, 그때는 광장을 살펴볼 여유는 없었다.

 

러시아는 국토가 넓어서 그런지 광장 문화가 발달해있다. 시내 최중심부에 광장이 없는 도시는 거의 없다고 봐도 되고, 최중심부가 아니더라도 곳곳에 광장이나 넓은 공원부지 같은 게 있다. 모스크바는 붉은 광장, 노보시비르스크는 레닌 광장, 하바롭스크도 레닌 광장이다.

 

광장 한쪽으로는 곰 마크가 그려진 하바롭스크 주정부청사가 있고, 한쪽으로는 레닌 동상이 있다. 예전에는 레닌 동상이 광장 가운데에 있었는데, 소련이 붕괴한 이후 광장 구석에 계시게 되었다고 한다. 레닌 동상과 입구의 열이 딱 맞아서 뒤의 건물도 박물관 같은 것이 아닌가 싶었지만, 그런 것은 아니고 음식점이랑 쇼핑센터 등이 들어와있는 복합문화공간이었다.

 

광장 이곳저곳 사진.

광장을 한가롭게 걷거나 벤치에 앉아서 느긋이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도 여행에 있어서 상당히 만족스러운 일과다. 그러나 이날은 비가 계속 부슬부슬 내려서 광장은 둘러보는 것으로 끝낼 수 밖에 없었다.

 

비가 계속 내리는 것이 너무 짜증나서 레닌 동상쪽 건물에 들어갔다. 우산을 팔면 사고 싶었고, 그렇지 않더라도 잠깐 건물 안쪽을 걷거나, 그게 안된다면 현관에서라도 비를 피하고 싶었다. 태양을 피하고 싶은 비와 달리, 비를 피하고 싶은 나였다.. 아아, 부족한 체력이여!

 

이때 나는 내가 건물에 왜 들어왔는지 친구에게 설명할 정신도 없을 정도로  이미 지쳐있었다. 당연히 친구는 우리의 계획에 전혀 없던 건물에 들어간 것에 의아해했고, 사실 당시엔 이 건물이 뭔지도 몰랐기에 우리가 들어가도 되는 것이 아닌 것 같은데, 빨리 나와야 하지 않겠냐고 재촉했다.

 

친구의 요청으로 건너편에 있는 토니모리를 갔다왔다. 세안용 클렌징폼을 어떻게 설명해야 될지 몰라서 '얼굴을 위한 비누'라고 했는데, 한 번에 전달하진 못했지만 다행히도 직원분이 잘 찾아서 클렌징폼을 사올 수 있었다. 러시아의 화장품점 가운데는 대부분 '한국 화장품점'이 많은 것 같다. 그만큼 K-뷰티가 유명하다는 것이겠지? 정작 한국에 사는 나로서는 체감이 안 됐는데, 외국에 나가보니 한국 화장품의 위상이 어디에 있는지 알 것도 같다.

 

다음 행선지로는 역사박물관을 가기로 했었다. 어떻게든 버스를 타고 가고 싶었는데, 쌩쌩한 친구는 또 걸어가자고 했다.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이때 말했어야 했다...) 기다리던 버스도 몇 분동안 안 오고 해서, 우선 걸어가기로 했다.

 

공원 일부분엔 예쁘게 꽃도 심어져 있다.
쭉 뻗은 전형적인 러시아 공원.
신기한 알 조형물.
전구를 달아놓은 것도 예쁘다.

당시에는 힘들었지만 사진을 보니까 또 멋진 풍경이긴 하다. 정말 감사하게도 박물관으로 가는 길에 비는 그쳤고, 고갈된 체력이 돌아오진 않았지만, 아무튼 박물관까지 걸어갈 수는 있었다.

 

가는 길에 거대한 녹지인 디나모 공원Парк Динамо이 있는데, 사진으로 표현이 안될만큼 여름날 울창한 나무들이 뿜어내는 푸르른 공기와 아기자기한 조형물들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 그리고 러시아식 공원의 투박함이 주는 특유의 느낌까지 하바롭스크에 간다면 한번쯤 들러봐야 할 곳인 것 같다.

 

'러시아의 냄새'라는 주제로 이웃분께 댓글을 남기기도 했던 얘기지만, 러시아는 도로변에는 노후차들이 뿜어내는 필터링되지 않은 디젤 냄새가 나지만... 동시에 그 기름을 팔아서 번 돈으로 관리되는 드넓은 녹지가 이걸 죄다 빨아들이는 이상한 동네다.

 

체력상 버스를 타고 갔어야 할 길이지만 걸어가게 되었다.
러시아 골목 뒷마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콘크리트벽과 녹지의 이상한 조화
도보 25분쯤 걸리는 거리였다.

30분 가량 걸은 끝에 마침내 박물관에 도착했다. 여기에도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는데, 박물관이 겉보기에는 옆에 있는 기관(문화궁전으로 추정)과 같은 건물이라서 처음에는 가장 큰 문으로 들어가면 되겠거니 해서 들어갔는데, 안에서 군복 입은 아저씨가 나오더니 무슨 일이냐고 물어봤다. 러시아어가 안되던 우리는 잠깐 입이 얼어붙었지만 아저씨는 '무제이'를 어떻게 알아들으셨고, 박물관은 옆 건물이라고 알려주셨다.

 

그러나! 박물관에 도착하자 이미 이날은 문을 닫은 상태였다. 입구의 아주머니는 친절하게 내일 오라고 말씀해주셨지만 반 시간을 걸어서 쓸모없는 곳에 왔다는 실망감에 나의 체력은 바닥을 찍었다.

 

박물관과 옆 건물인 문화궁전. 정말 헷갈릴만하게 생겼다.

 

그리고 이 체력저하에서 온 분노는 자연스럽게, 오늘 버스를 한 번도 타지 못하게 했던 원흉(?)인, 나의 친구에게 향했다. 그렇지만 당장은 이유없는 분노를 참은 나는 이제는 내 의견을 관철해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주변에 저녁을 먹을만한 곳을 찾다가, 옆 건물인 백화점에 몇 개가 뜨는 것을 보고 여기를 들어가보자고 했다.

 

지도에서 찾은 곳을 그렇게 들어가보니 조금 고급스러운 라운지형 백화점 푸드코트였고, 친구는 여행까지 와서 이런 곳에서 밥을 먹는 것은 별로라고 생각했나보다. 또 비토권을 행사하고 다른 레스토랑을 가자는 친구의 말에  도저히  체력이 없어서 여기서 밥을 먹고 싶었던 나는 우선 수긍하긴 했으나, 이내 오늘 내내 쟤 말을 들어서 잘 된 게 하나도 없는데 내가 언제까지 말을 들어줘야 하는 것인가, 라는 생각이 들어서 에스컬레이터를 뛰어내리듯 내려와버렸다.

 

눈앞에서 나를 놓친 친구는 당황해서 당연히 전화를 걸었고, 결국 잘 내려와서 85п번 버스를 타긴 했다. 나한테 불만이 있다는 것을 너무 가시적으로 표출한 탓에, 버스에서 친구와 내심을 털어놓는 얘기를 하게 되었다. 사실 오늘을 돌아보면 아이스크림도 사먹고 싶지 않았고, 비를 맞기 싫어 우산도 사고 싶었고, 비를 피하려고 쇼핑센터도 둘러보고 싶었고, 박물관까지는 버스를 타고 싶었고, 배가 고파서 푸드코트에서 대충 저녁을 때우고 싶었지만 정작 친구의 말에 마지못해 굽혔을 뿐, 내 요구사항은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아직도 어리지만 이때 나는 더 어렸고, 나와 다른 배경에서 자란 친구와 단둘이 여행을 온다는 것이 도무지 쉬운 일이 아님을 깨닫게 된 첫 날이었다. 이것저것 속마음을 털어놓다보니 정말이지 깨달은 바가 많았다. 그리고 서로 원하는 바가 꽤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다음 날은 각자 다녀보기로 했다. 박물관에서 우크라이나 식당으로 향하는 85П번 버스에서 오늘 내내 힘들었던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2018 하바롭스크-블라디보스톡 여행기 전체 목록

  1. 2020.04.04 - 하바롭스크 여행기: #1 헤맴의 연속
  2. 2021.01.17 - 하바롭스크 여행기: #2 또 시작된 헤맴
  3. 2021.01.18 - 하바롭스크 여행기: #3 갈등과 깨달음
  4. 2021.01.27 - 하바롭스크 여행기: #4 비 내리는 하바롭스크
  5. 2021.07.19 - 하바롭스크 여행기: #5 이틀차 저녁식사, 중심부 산책
  6. 2021.07.21 - 하바롭스크 여행기: #6 역사박물관과 프라오브라젠스키 성당
  7. 2021.07.23 - 하바롭스크 여행기: #7 홀로 산책하기 좋은 도시... 그리고 새벽의 파티.
  8. 2021.07.25 - 하바롭스크 여행기: #8 조지아 음식! 삼사! 하바롭스크 마지막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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